9. 불방일(不放逸) - 돈오의 허구성 "비구들이여, 밤하늘에서 온갖 별들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달빛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밤하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기에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또 가을 하늘에 한 점의 구름도 없을 때, 해는 하늘에 떠올라 일체의 어둠을 쓸어버리고 눈부시게 시방(十方)에 빛을 던지지 않느냐? 그러기에 가을 하늘에서 해는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相應部經典] 45:146 月. 147 日) '방일'은 자제하지 못하고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이 '불방일'이다. --------------------------------------------------------------------- ◈ '불퇴' 또는 '불퇴전'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나 그대로 실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나'라는 제자가 열반을 체험하고 읊은 노래를 보자.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 자신을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쉽게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극단적인 수행에 매달려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실현되지 않아서 걱정과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 때 붓다가 거문고 줄의 비유로 그를 타일렀고, 그 가르침에 의해 차츰 도를 즐길 수 있게 되어 마침내는 열반의 경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티카(瞿低迦)의 경우는 비참하게 끝난다. 이 대목은 참으로 비통해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는 어느 바위굴에 있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몇 번인가 해탈의 심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런 경지는 지속되지 못하고 그 때마다 원상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 일을 6번이나 되풀이하다가는 마침내 칼을 들어 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뒤로 후퇴(퇴전 退轉)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뿌리만 안 상하여 든든하다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생기며, 애욕을 뿌리째 끊지 않으면 또 다시 되풀이해 고(苦)는 생기리.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불퇴' 또는 '불퇴전'을 갈망했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기까지 오면 절대로 타락할 염려가 없다는 경지, 그런 불퇴, 불퇴전의 자리라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비발치(avaivartika, avinivartanlya)'이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다시는 전락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후세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놓고 열심히 토론했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런 경지가 있을 리 없다. 오직 '불방일' 만이 그런 전락을 막아 줄 뿐이다. 그러기에 붓다는 자주 말하였다. "불방일한 사람이기만 하면 그는 반드시 팔정도를 익히고, 그것을 반복하여 닦는 중에 마침내는 열반에 도달하리라" 또 붓다는 이렇게도 말했다. "온갖 선(착한 법)은 모두 불방일을 근본으로 하고, 모두 다 다 불방일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불방일이 모든 착한 법 중에서 최상이다." 그래서 붓다는 밤하늘의 달과, 가을 하늘의 해에 비유하여 불방일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 돈점 논쟁 이런 붓다의 입장과 비교하여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으니 후대 불교인들간에 벌어진 돈점(頓漸)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런 돈점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대승 불교의 경전도 붓다의 설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 보면 이렇다. "인간의 근기(根機, 소질)는 갖가지이니까 가르침을 듣고 대번에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일동안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깨닫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돈기(頓機), 후자는 점기(漸機)이다." "또 같은 붓다의 가르침에도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점차적으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끌어올리는 것도 있다고 하면서 전자는 돈교(頓敎), 후자는 점교(漸敎)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승을 우월적인 지위에 놓으면서 돈(頓)을 점(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전을 문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진실한 붓다의 가르침이란 [아함경] 뿐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고 나서기가 어렵다. 그리고 불방일을 강조하는 붓다로서는 결코 돈교적인 입장일 수 없다. 만일 오늘 우리가 붓다에게 돈점을 묻는다면 아무래도 점교의 부류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수학자가 붓다를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못가라나(目健連)라고 하였다.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 못가라나(大目健連)와 구별키 위해 이 경에서는 '수학자 못가라나'라고 불렀다. 그가 먼저 물은 것은 불교에도 순서를 좇아 배워야 할 길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학자다운 질문이었다. "대덕이시여, 제가 이 정사까지 오는데도 거쳐야 할 길이 있으며, 또 저의 전문인 수학도 차례를 좇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치심에도 또한 밟아야 하는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까?" 붓다는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붓다의 설명이 꽤 길기 때문에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먼저 계(戒)를 지킬 것, 그리고 오근(눈, 귀, 코, 혀, 피부)을 제어 할 것, 다음에 또 정념(正念), 정지(正知)를 성취하여 지혜로써 번뇌를 누르고 온갖 집착과 불선을 떠나 점차 무상 안온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것. ([중부 경전] 107 산수가목건련경. 한역 동본, [중아함경] 144 산수목건련경) 한 마디로, 점진적으로 도를 성취해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 ◈ 붓다는 길을 가르쳐 줄 뿐 그 수학자가 다시 물었다. "그런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누구나 열반에 이르게 됩니까?" 붓다가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 반문했다. "그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엄연히 열반이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또 세존께서 스승이 되어 계신데, 어떠한 이유로 이르는 사람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붓다가 특유의 반문을 시작했다. "그러면 벗이여, 그대에게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자. 그대는 아마도 그들을 위해 자세히 길을 일러주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사히 그곳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맬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겠는가?" "저는 길을 가르쳐 줄 따름입니다. 그것을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와 같으니라. 열반은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 중에는 열반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 답변에 좀 차갑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여기에서 붓다의 진면목이 드러나 있고, 나아가서 불교 자체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일 뿐, 붓다는 결코 전지 전능의 구제자가 아니며 또 신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도 아니다. 따라서 붓다만 예배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붓다의 진면목이란 무엇인가. 그는 스스로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고 정도를 실천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너희도 이렇게 인식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가르치는, 도사(導師), 지혜와 실천의 선구자요 안내자, 이것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 ◈ 실천은 자기 책임 따라서 붓다가 아무리 지혜를 가르친다 해도 그 지혜와 실천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눈을 떠서 존재의 진상을 보는 것, 마음을 다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 모든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한다. 붓다는 성구(聖句)를 외는 사람을 비판하여 "남의 소를 세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것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만년의 붓다는 자주 다음과 같이 설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니 너희는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 여기서 섬(dipa)이라고 한 것은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는 한가운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지는 확고한 의지처란 자기 자신과 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법에 의해 제어되는 자기만이 유일한 의지처라는 뜻이다. 이런 것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자기가 잘 제어되는 때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로다. (160) 불교란 본래가 이런 가르침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낸다면 붓다가 설하신 것은 결국 자기 형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형성의 길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따위의 한계는 없다. 오직 자제, 집중, 지속적인 태도로 일생 동안 쉬지않고 가야 할 뿐이다. 그래서 붓다가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유언도 불방일이다. "그러면 비구들아, 나는 너희에게 이르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느니라. 불방일하여 정진하도록 하라." [대반열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