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곡(香谷)스님

방패(防牌)

어느 해 여름 안거(安居)가 끝난지 며칠 뒤였다.

여름 안거가 끝났다고는 하여도
아직 한낮은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
바깥에 나다니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때였다.

그런데 향곡 스님께서 불쑥 파계사로 찾아오셔서는
선걸음에 당신을 따라 나서라고 하셨다.

어리둥절한 나는
잠시 앉아 쉬시면서 땀이나 식힌 다음에 가시자 해도
스님은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어 따라나서면서
"어디를 그렇게 서둘러 가십니까?"라고 물으니
"철 수좌(徹首座)한테 간다." 하신다.

"저는 가기 싫습니다. 혼자서 가십시오."
"혼자는 가기 싫다."

"그러시면 누구 다른 스님을 데리고 가십시오."
"철 수좌가 다른 스님은 싫어할 게고, 유찬 수좌면 받아줄 것이니 같이 가자."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가보면 안다."

하는 수 없이 함께 가면서 줄곳 입씨름을 하였다.
성전(聖殿)에 도착하니 성철 스님께서 향곡 스님에게 대뜸
"뭐하러 왔노." 하셨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문안에 들어서지도 말고 어서 돌아가라는 어투였다.
그러면서도 두 스님은 방 안으로 들어가
서로 마주 보고 큰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그래서 유찬이 데려왔제."
"뭐라! 유찬이 니가 혜림(蕙林, 향곡 스님의 字)이 방패가?"

듣고 보니 나는 요절복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리를 꺾으면서 가가대소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향곡 스님은 내 몸의 배나 되게 뚱뚱하였다.
그래서 늘 호호법당(好好法堂)이라고 스님을 놀렸다.

법당은 스님의 육신(肉身)을 두고 하는 말이다.
법당안에 부처님이 계시듯이
스님의 몸 안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향곡 스님의 그 큰 몸집을 방어하려면 방패는 그보다 커야 제격이다.
그런데 나는 키만 컸지 몸집은 지팡이 마냥 가늘었다.

볼륨이 스님의 2분지 1밖에 안 되니
향곡스님의 방패가 될 수 없을 것임에도
성철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에는 향곡 스님을 향한 성철 스님의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몸집이 향곡 스님의 방패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향곡 스님의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 법도 지킬 수 없는
나의 수행력(修行力)을 말하고,

또 동시에 그러한 내가 향곡 스님의 방패라고 하면
향곡 스님의 경지도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거죽만 참선 수행하는 수좌모양을 했지,
수행에 있어서는 '제로'이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야호선(野狐禪)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를 사이에 두고서
두 선장(禪匠)의 하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배꼽을 쥐게 한 것이다.

야호선은 사이비선(似而非禪)이다.

그러한 나와 오랜 도반(道伴)일 뿐 아니라
서로 수행을 해서 도달한 경계를 인정하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인 향곡스님,
이 두 사람을 성철 스님은 한 방(榜)에 결단을 낸 것이다.

그러나 향곡 스님은 요지부동, 가슴을 내밀고서
"스님은 내가 방패가 필요한 줄로 아나. 자 찌르시오." 하신다.

향곡 스님은
발음이 어눌하고 머리가 기민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는 스님이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때때로 온 몸으로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봉암사에서는 법거량(法擧揚)을 하는데
향곡 스님이 성철 스님을 들어서 메어꽂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몸으로 말하는가 싶었더니
성철 스님께서 그 예봉을 피해 나에게
"이게 웃을 일이가. 미친놈!" 하셨다.

나를 향해서 "미친놈!" 하신 것은
기실 나를 향한 화살이 아니라
향곡 스님의 육탄(肉彈) 공격을 미리 막자는 것이다.
몸으로 말하면 그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그때, 머리가 기민하지 못하다는 향곡 스님께서 손을 내두르시며
"그만 두래이 내 다 안다. 그만 두래이." 하셨다.
이것을 신호로 일회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방 안에는 싸늘한 전운이 감돌 듯이 침묵이 가득했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 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무거운 침묵을 깨야 내가 숨을 쉴 것 같았다.

차라리 두 스님이
다시 호각지세(互角之勢)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머리 속은
온통 두 스님 사이의 전단(戰端)을 모색하느라 분주했다.

그 때, 성철 스님께서
"유찬이, 니, 향곡 스님이 뭐라카고 데려왔제." 하셨다.

"가보면 안다 하셨습니다."

"가면 안다? 뭣을 안다카드노.
니도 사기꾼이제.
쏙는 놈은 다 사기꾼인기라.
쏙는 놈은 사기꾼 에미인기라.
그러니 더 큰 사기꾼 아닌가베.
그렇제? 맞제?

전단을 찾느라 머리 속이 분주한 나에게 뜻밖의 화살이라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나에게 성철 스님께서
"나보다 더한 사기꾼이 어디 또 있나.
나에게 쏙지 말라고 니 데려온기라 알겠나." 하셨다.

향곡 스님, 박장대소하시면서
"쏙는기 무어 다른 기라? 마음에 상처 입는 기제?
유찬 수좌는 마음에 상처 입고 아픈 적이 있나.
마음의 병은 깊어도 아프지 않을 수도 있으니
상처를 입어도 모르기 쉽제" 하셨다.

성철 스님은 "모르기로.."하셨다.
즉 "모르고 말고"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말 뜻은
"유찬이, 니가 알 턱이 있는냐." 하신 것이다.
물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회전의 전단은 벌어졌다.
헌데 이번에는 내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얼르면 한쪽에서는 때리는 형국이었다.

달아오른 내가
"제가 속는기요.
두 분 스님께서 저에게 속으셨습니다.
상처가 아프십니까?" 하였다.

성철 스님 "니가 가진 기 있어야 나를 속이제."
향곡 스님 "가진 기 있으면 내놓아라. 어서"

선서(禪書)에 보면
이런 때 주먹을 들어 보이거나
발길로 걷어 차거나
깔고 앉은 방석을 잡아당겨서 상대방을 넘어뜨리기도 하는데
도무지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를 않았다.

내딴에는 제법 많은 선서를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꾸할 적당한 말이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서 물을 구하듯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이
반산(盤山)의 삼계무법(三界無法)이었다.

그래서
"반산은 삼계무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있다고 내 놓아라 말아라 하십니까." 했다.

그러한 나를 향하여 성철 스님.
"땀 날끼라. 올 여름에도 땀 많이 흘렸제."하셨다.

그러자 향곡 스님,
"땀은 일할때 흘리는 기고,
공부는 죽자 사자 한다고 되는 기 아니라.
물 흐르듯 해야제."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가기 싫다는 나를 데리고 와서는 이러니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한 내 마음을 아셨는지 향곡 스님께서
"마, 땀을 흘렸드라도
배고프면 밥은 먹었을 끼고,
곤하면 쉬었을 끼고
졸리면 잤을 끼고,
삼계무법이니 부족한 것은 한나도 없었을 끼라." 하셨다.

성철 스님,
"삼계무법인데 무엇을 먹노. 말해봐라.
내 보기에 땀을 흘리는 것이, 허해서 그렇다.
아무 것도 먹은 기 없는 기라.
단단히 병에 걸린 기라.
유찬이, 니 화두병(話頭病) 걸린 기 아이가."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하. 오늘의 주제(主題)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했다.

그런데 왜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이곳에 왔는가 하는 의심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였다.

"좌선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화두에 전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느새 화두를 잃어 버립니다.
이런저런 잡념이 몰려와 잡념에 매달려 있는 사이에 화두는 사라지고 맙니다.
누구는 화두와 씨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화두와 씨름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화두와 씨름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향곡 스님, "묵조선(默照禪)의 문 밖에 와 있구나."
성철 스님, "차라리 간화선(看話禪)의 구업(口業)이나 지어라."

여기서도 성철 스님은 때리는 시어머니이고
향곡 스님은 말리는 시누이였다.